동아시아 커피와 문학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 고종에서 모던 보이·걸까지 역사적 여정

jhjung1720 2025. 7. 25. 07:24

커피는 단순한 음료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공기를 담는 매개체이며, 사회 변화의 징후를 포착하는 감각적 코드이자 사유의 촉매제다. 동아시아에서는 커피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 독특한 과정을 거쳤고, 그 여정은 곧 문학의 서사와도 맞닿아 있다. 조선 말기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접한 순간부터, 20세기 초 도시를 누비던 모던 보이·걸이 커피 한 잔 앞에서 사유하고 연애하던 장면까지,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은 나란히 걸으며 시대의 감성을 기록해 왔다.

이 글은 커피라는 이국적 음료가 동아시아 사회에 스며드는 과정과, 그것이 문학적 상상력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커피가 단지 수입품에서 문학 공간의 상징으로 변모한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한 사회의 근대성과 감수성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커피가 문학 속에 등장하는 방식은 단순한 배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시선과 세계관, 그리고 시대의 문화적 욕망까지 반영해 낸다.

동아시아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커피를 받아들였고, 각기 다른 문학적 화법과 정서로 그 향기를 담아냈다. 일본 다이쇼 시대의 지식인 문화, 경성의 낭만과 혼돈, 상하이의 식민지적 복합성과 문화혼종성은 모두 커피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적 풍경을 형성했다.

역사적 여정으로 본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

이 글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곧 자기표현이자 사유의 실천이 되었던 시대, 그 시간의 기록을 따라가며 우리는 동아시아 문학과 커피 문화가 어떻게 서로를 비추고, 길항하고, 함께 성장했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고종과 커피 근대의 문턱에 선 조선으로 본 제국의 향기

19세기말 조선은 강제 개항과 열강의 압력 속에서 혼란스러운 근대화를 맞이했다. 이 시기,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셨다는 일화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커피는 당시 조선에 전무하던 음료였고, 이를 마신다는 행위는 곧 서구의 생활양식을 수용하는 첫 단계를 의미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커피를 즐겨 마셨고, 이후 궁궐 안에도 커피를 끓이는 ‘정관헌’이라는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커피의 향기는 곧 상류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문학 속에서도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문인들은 커피를 낯설고 서양적인 감각의 상징으로 인식했고, 이는 곧 근대성에 대한 양가적 감정, 동경과 거부로 이어졌다. 커피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지만, ‘문명의 냄새’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이 처음 만난 역사적 접점으로 기억된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미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커피가 도시 일상에 편입되었고, 다방(喫茶店)은 지식인들의 소통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 공간에서는 당대 문학가들이 모여 근대 문학의 형태를 실험하고, 정치·사회 문제를 논의했다. 일본 문학에서 커피는 감각적 배경이자 문명의 징표로 자주 등장하며, 작중 인물들이 ‘근대인’으로 자리 잡는 상징적 장소로 자주 설정된다.

 

모던 보이 모던 걸과 문학 속의 커피 공간으로 본 다방의 시대

1920~30년대 경성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활보하던 도시였다. 이들은 근대화와 도시화의 아이콘이었으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세대였다. 이들에게 다방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정체성과 감성을 표현하는 무대였고, 문학은 그들의 언어로 다방을 기록했다.

김유정의 소설 속 인물은 다방에서 여자 종업원과 티격태격하면서도 묘한 감정선을 형성하고, 이태준은 "달밤"에서 한 남자의 가난과 체념을 커피 한 잔에 담아낸다.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정신"에는 카페 공간의 감각적 이미지와 심리적 복잡성이 뒤엉킨다. 다방은 문학 속에서 단지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근대적 고독과 연애, 계급적 욕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이 시기의 여성 작가들 또한 다방을 자주 배경으로 활용했다. 박화성, 나혜석 등의 작품에는 자율적인 여성 주체가 다방에서 자신의 언어와 사유를 확립해 나가는 모습이 등장한다. 다방은 성 역할의 전복, 여성 해방의 서사가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중국 상하이의 작가들은 프랑스 조계지와 커피하우스를 통해 서구의 도시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루쉰은 커피에 대한 감상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산문 속엔 서양식 공간과 감정이 녹아 있다.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의 접점은 이처럼 도시, 젠더, 계급, 감각의 모든 층위에서 복잡하게 중첩된다.

 

현대의 재해석으로 본 커피가 낳은 문학 문학이 만든 커피

21세기 들어 커피는 더 이상 특별한 사치품이 아니다. 편의점에서도 고급 원두를 맛볼 수 있고, SNS를 통해 누구나 커피 사진을 공유하며 일상을 기록한다. 문학 속 커피 역시 단지 이국적인 배경이 아니라, 일상성과 철학적 성찰을 담는 장치로 진화했다.

현대의 시와 소설에서는 커피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 사회적 고립, 정체성 혼란 등의 주제가 심화된다. 김영하의 단편에서는 커피를 사이에 둔 대화 속에 타인의 내면을 가늠하려는 시도가 있고, 김애란의 에세이에는 커피 한 잔으로 사는 날의 감정곡선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담긴다. 커피는 더 이상 상류층의 기호가 아니라, 누구나 향유하며 그 의미를 스스로 재해석하는 문화가 되었다.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교차한다. 작가들은 커피를 통해 사회와 인간의 거리를 탐색하고, 다방이 아닌 개인의 방 안에서도 창작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은 스타벅스에서 집필하고, 일본의 에세이스트는 커피를 ‘사유의 창문’이라 부른다.

결국, 동아시아 커피와 문학의 여정은 단지 역사적 유산을 되짚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감정과 경험을 새롭게 재조립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살아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그것은 고종의 시대를 지나 모던 보이의 연애를 건너, 지금 이 순간의 사유로 이어지는 문화적 계보이다.